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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발생한 후쿠오카 대학교의 반더포겔부 불곰 습격사건은 최악의 사건

뉴스정보 2022. 8. 22.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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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다카야마계 후쿠오카 대사고의 검증



 1970년 7월, 히다카산계 캄이에쿠우치카우시산(해발 1979미터)에서 일어난 후쿠오카 대학 원더포겔부의 곰 사고는, 젊은 학생 3명이 사망하는 결과가 되어, 등산자나 일반 시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불곰의 사고 속에서, 실은 등산자의 사망 예는 극히 적고, 전체의 10%에도 못 미친다. 가장 많은 것은 사냥 중이며, 낚시와 산채 채취, 삼림 작업 중 등이 이것에 이어진다.
 야브 속을 열중 채취하는 산채 채취나 소리가 전해지기 어려운 계류낚시 등에 비해 등산자는 ‘갑자기 조우’형 사고는 적다. 하지만 이번과 같이 집요하게 돌리는 비정상적인 타입은 인간에게 큰 공포를 준다. 왜 이 가해 곰은 '이상한 곰'이 된 것인가.
 젊은 다케인의 죽음은 아프다. 아무리 반성의 말을 나란히 해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죽은 자나 그 주위의 과실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초래한 경과 속에서 살아 있는 우리가 배워야 할 일은 많이 있다. 견해를 바꾸면 등산 중뿐만 아니라 익숙한 야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의 싹이 있을 것 같다.
 후쿠오카 다이완겔부의 사고 보고서를 바탕으로 경과를 되돌아 본다.

■ 제1, 제2의 습격(25일)
 후쿠오카대의 5명은 1970년 7월 14일, 히다카 산맥 종주를 위해, 북부의 아무로다케에서 입산했다.
 25일 오후 3시 20분쯤 캠이 에쿠우치 카우시 산북쪽에 있는 쿠노사와 컬에 도착해 텐트를 설영.
 오후 4시 반쯤, 저녁 식사 후에 전원이 텐트 내에 있었을 때, 6-7미터 앞에 곰을 발견. 처음에는 흥미 본위에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윽고 밖에 있던 잭을 억지로 식량을 먹기 시작했기 때문에, 쟁기를 보고 잭을 회수, 모두 텐트 내에 넣었다. 불을 치고, 라디오를 울리고, 식기를 치고 있으면, 곰은 30분 정도로 모습을 지웠다(제1의 습격).
 오후 9시쯤 곰의 콧물이 되어 텐트에 주먹 큰 구멍이 뚫린다. 2명씩 교체로 일어나 감시를 했다(제2의 습격).

■인장
 7월 26일 오전 3시 기상. 철수 준비 중인 오전 4시 반 다시 곰이 나타나 가까워졌다. 텐트에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5명은 지주나 텐트지를 잡고, 5분간 정도, 곰과 텐트를 끌어당기는 형태가 되었다(제3의 습격).
 마지막으로 곰과 반대측의 막을 올리고 5명이 모여 능선 방향으로 도망쳐 50m 정도 떨어졌다. 곰은 텐트를 쓰러뜨리고 자크의 내용을 받았다. 자크를 둘러싸고는 관목 안에 숨기는 행동을 반복했다.
 리더A군의 지시로, 서브리더B군과 최연소의 E군의 2명이 9의 사와를 내려, 헌터 출동을 부탁하게 되었다.
 2명은 오전 7시경, 하치노사와 만남에서 홋카이다케 우회(홋카이 학원대)의 18명 파티를 만나, 구원 요청을 의뢰. 쿡탑이나 식료, 연료, 지도를 빌려 남은 3명과 합류하기 위해 하치노사와를 다시 올랐다.

■황혼의 습격(26일)
 26일 오후 1시 캄엑악 근처 능선에서 내린 2명과 남은 3명이 합류. 능선상에서 돗토리대, 중앙철도학원의 파티를 만난다.
 오후 3시 능선 쪽이 안전하다고 판단해 텐트를 치른다.
 오후 4시 반, 곰곰 출현. 종주로를 50미터 정도 내려 1시간 반 정도 모습을 본다. 오후 6시경, 돗토리대의 텐트에 피난하게 하기로 결정. 능선을 벗어나 컬을 내리기 시작한다.
 오후 6시 반 능선에서 60-70m 떨어진 곳에서 바로 뒤에 있는 곰을 눈치채며 전원이 달려간다.
 E군이 먼저 습격당해 야브 속에서 비명이나 격투 소리가 난 뒤 "다리를 끌면서 컬 바닥의 돗토리 큰 텐트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리더 A군이 「전원 집합」을 걸었지만, 모인 것은 B군, D군의 3명만. 2학년인 C군은 대답하는 목소리는 30m 정도 아래에서 들렸지만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는 빠져버렸다. C군은 이 후 혼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27일 오후 3시까지는 생존했던 것이 유품의 메모에서 알았다.
 오후 8시쯤 3명은 안전할 것 같은 바위밭에 몸을 대고 비버크했다.
 돗토리대는 모닥불을 하고, 휘슬을 불는 등 해 주었지만, 그 후, 늪을 따라 하산한 것 같았다.
 
■마지막 습격
 27일 아침은 안개가 진했다. 3명은 오전 8시부터 행동을 개시. 이와바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에 곰이 출현했다.
 리더 A군이 곰을 밀어내듯이 진행되어 그대로 컬의 바닥쪽으로 곰에게 쫓겨갔다. A군도 시신에서 발견된다.
 남은 두 사람은 컬을 피하면서 하치노사와에 나와 늪을 내렸다. 오후 1시, 사방댐 공사 현장에 도착해 차를 준비해 달라고 한다. 오후 6시 중찰내 주재소에 두 사람은 보호됐다.

■외로운 밤
 26일 저녁에 동료들과 얽힌 C군은, 외로움과 공포 속에서 수첩에 메모를 남기고 있었다. "아래의 모습은 전혀 몰랐다. 곰의 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그는 모닥불이 보인 돗토리대의 텐트에 도망치려고 황혼 속을 내렸지만 곰에 발견되어 쫓기는 형태가 되었다.
 가케에 올라 돌을 던지고 "15㎝ 정도의 돌을 코를 쳐서 던진다. 맞았다. 곰은 뒤집힌다. 라고 생각해… 한눈에, 도망치는 것을 결정 도망친다”라고 썼다.
 넘어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드디어 도망친 텐트에는 아무도 없었다.
 "왠지 슈라프에 들어가면 안심감이 나와서 떨어졌다. 그럼 모두를 생각했지만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대WV가 무사히 보고하고, 구조대가 오기를, 기도하고 자는다”
 다음 27일, 이른 아침부터 깨어났지만, “밖의 일이, 신경이 쓰이지만, 무서워서, 8시까지 텐트의 안에 있는 것을 결정한다.”
 텐트 안의 밥을 먹고 조금 진정했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또, 곰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되기 때문에, 또 슈라프에 빠진다. 아, 일찍 하카타에 돌아가고 싶다」라고 애틋한 말이 이어진다.
 오전 7시, 시모야마를 결의해 잡아 밥을 만들어, 텐트내의 셔츠나 양말을 빌려 밖에 나오지만, 「5m상에, 역시 곰이 있었다. 너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이대로 텐트 안에 있다」 .
 절망의 메모는 글자가 흐트러져 불안을 쓰고 끊는다.
 「3:00
 경  까지

하고
 …

■습격의 목적 변화
 사건으로부터 15년 후인 1985년, 곰곰의 회의 회보 「브라운곰」에, 당시 수색이나 구원에 해당한 현지의 헌터나 등산가 등 9명에 의한 좌담회가 게재되고 있다.
 거기서 꼽힌 요인의 제일이 '한번 곰에게 빼앗긴 자크를 되찾았다'는 점이었다.
 제1부터 제3의 습격까지는, 이 곰은 인간이 아니라, 잭과 그 안의 음식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같다. 학생들도 몸의 위험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곰이 적극적으로 공격해 오는 케이스에는 '아이곰을 지키기' '조우하고 흥분했다'와 나란히 '먹이를 지키려고 한다'는 행동이 있다. 히다카의 경우, 비록 인간이 소유하는 소중한 잭이라도, 곰이 일단 거칠고 안의 물건을 먹었을 경우, 인간이 「돌려주는」 행동은, 곰으로부터 하면 「빼앗긴」하게 된다 .
 후쿠오카대의 경우는, 자크의 오가가 몇번이나 있어, 점차 브라운의 행동이 대담하게, 공격적으로 되어 왔다. 그리고 제3의 습격(텐트의 인장)을 경계로, 곰은 인간 그 자체를 집요하게 쫓게 되었다.
 지근거리의 '인장'이라는 행동을 통해, 곰에게 있어서 등산자가 '방해자'에서 '적'으로 변화해 갔을지도 모른다.
 시체의 상황은 물기, 긁힌 상처가 다수 있어 하복부와 대퇴부가 얽혀 있지만, 좌담회의 참석자는 “식해가 목적이 아닐 것”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배를 비우고 인간을 '먹는' 목적으로 덮쳤다는 뜻이 아닐 것 같다.

■ 또 다른 습격
 실은 동일 개체로 생각되는 곰의 습격이 사고 직전에 일어나고 있다.
 후쿠오카대 파티에 식량과 쿡탑을 빌려준 홋카이다케 우회(홋카이 학원대) 중 5명 파티가 7월 24일 오후 2시 반쯤 쿠노사와에 가까운 능선상에서 곰으로 쫓겨났다. 바위 위에 올라가기 겨우 어려움을 피했지만 5명 중 3명의 잭이 이때 빼앗기고 있다.
 목격된 곰은 2m가 될 거대한 곰으로, 후쿠오카대를 덮친 몸집이 작은 곰과는 엇갈림이 있지만, 장소나 시간부터 하면, 같은 가능성은 높다.
 더욱이 사건 약 1개월 전 6월 초순 단독 종주에 들어간 무로란 회사원이 캄엑산 부근에서 행방불명이 되고 있다. 증거는 전혀 없지만, 날씨는 좋고, 활락 등의 흔적도 없기 때문에, 곰 사고와의 관련도 의심되고 있다.

■시모야마의 판단은?
 불곰의 공격이 에스컬레이트 하는 가운데, 사고는 피할 수 없었던 것일까.
 현지 등산가는 “히다카의 곰은 큰 소리나 라디오로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좌담회 참석자는 “학생들은 도망칠 기회는 많았을 것”이라고 유감스럽다. 결과론에서 빨리 하산하거나 다른 파티와 합류하는 등의 행동이 있으면 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에 관해서, 후쿠오카대의 보고서는 ①자크 안에 있던 금전이나 귀중품이 없으면 곤란하다 ②자크나 텐트를 가지고 돌아가려고 생각한 ③일정적으로는 무리가 아니었다, 하산하지 않았던 사정을 설명한다. 또 “(사람을 덮치는 듯한) 흉포한 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며 적절한 정보를 사전에 얻지 못하고 위험의 예측이 어려웠다는 점을 들었다.
 당시 현장 부근에 있던 각 등산대 중, 홋카이 학원대나 오비히로축산대 등의 도내세는 비교적 빨리 하산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것은, 후쿠오카대와 돗토리대, 중앙 철도 학원의 도외 파티 이었다.

■ 달리지 않는, 떠나지 않는
 곰이 있으면 현장에서 멀어진다, 라는 것은, 최근에는 잘 알려진 대응책이지만, 또 하나, 이동할 때는 모르고, 굳어 행동한다, 라고 하는 것도 중요하다 점이다.
 후쿠오카대의 일행도, 후방에 있는 곰을 알아차리고 도망치려 하고, 떠 다니거나, 흩어지거나 하고 있다. 야외에서도 여러 사람이 굳어지고 있는 곳을 곰에게 습격당했다는 케이스는 매우 적다. 복수 사망사고도 대부분이 멀어져 피해를 당하고 있다.
 1984년, 홋카이도 방송의 의뢰로 야생 생물 정보 센터의 오가와 엄씨(브라운의 회원 이사)가 노보베츠 곰 목장에서 실시한 실험이 있다. 곰곰의 운동장에 마네킹 인형을 매달아 시험해보니 정면에서 향해 다가가자 곰은 뒤엎어지지만, 등을 향해 도망치는 자세로 하면 갑자기 뛰어들어 밀어 놓지 않았다.
 좌담회에서도 「등을 향해 도망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습격해 온다」 「바로 만나도, 어쨌든 인간끼리 굳어 행동한다」 「흥분시키지 않는다. 돌 뭔가 던지면, 오히려 적이 되어 버린다 "인간도 무섭지만, 곰 쪽도 그 이상으로 무서워하는 경우가 많다" 등이라는 체험에서 태어난 조우 대책을 말했다.
 또한 곰 목장 실험에서 잭을 안에 넣자 곰은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1~2시간도 열중하고 다루려고 하면 집요하게 쫓았다고 한다.
 오가와 씨는 "곰에 쫓겨 났을 때 자크와 소품을 두고 시간을 벌는 것은 유효하지만, 되돌리는 것은 자살 행위이다. 또, 그 자리는 살아도 음식의 맛을 기억하면 다음 사람 가 쫓기게 되는 것으로 연결되므로 안이하게 물건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번의 곰은, 어딘가의 시점에서, 인간을 붙이려고 하는 「이상한 곰」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천천히, 가능하면 뒤따라서, 곰의 모습을 보면서 떠난다. 동료끼리는, 케시 하고 떠나지 않는다”는, 조우시의 기본 대책은 어느 정도 유효했을 것이다.

 후쿠오카 대파티를 덮친 것으로 보이는 곰은 7월 29일 하치노사와의 현장 부근에서 사살되었다. 구제대 앞에 경계하는 모습도 없이 나왔다고 한다. 2-3세의 젊은 암컷의 곰이었다.
 유골은 현장에서 관장에 붙어 이듬해 유품의 대부분이 회수되었다. 회수에 참가한 현지 마치다 〓씨는 “혈흔이 붙어 초라한 텐트나 카메라, 등산화 등이 남아 있어 왠지 아픈 장소였다”고 말했다.
 하치노사와 컬의 현장에는 추도의 판이 끼워져, 「다카야마에 잠들어 있는 영령과 마가도 슬픔 하치노사와」라고 있다.

          

2. 도마 전 사건 (삼모별 사건)


 1915년(다이쇼 4년)의 달, 도호쿠의 유모관 내 도마마에 산모베쓰 로쿠자나(현재는 도마마에초 산케이)의 개척 취락으로 일어난 브라운 베어에 의한 연속 습격 사건은, 사자 8명, 특히 민가에 피난 하고 있던 여성이나 아이가 희생됐다는 점에서 '무참', '공포', '거황' 등이라는 말과 함께 기억되어 '도마에무라 삼모별 사건'으로 말해 왔다. 하지만, 그것은, 바쁘다, 곰을 적으로서 미워하기 위해서만의 이야기일까. 현재도 이 나라에 곰과 함께 사는 우리는, 이 비극으로부터 계승해야 할 교훈은 없을까.
 임무관이라는 일 옆, 이 사건의 조사 발굴에 노력해, 당사자에게의 극명한 듣기를 거듭한 기무라 모리타케씨의 기록과 분석을 바탕으로, 곰의 움직임과 인간의 대응을 검증해 보았다. 기무라 씨는 전 곰의 모임 감사. 년에 아사히카와 영림국의 부내지 「한대림」에 사건의 조사 기록을 발표. 몇몇 저서에서도 접해 올해 ‘慟哭の谷’(공동문화사)에 정리하고 있다. 그 기록은 도가와 유키오 ‘후카이’, ‘황황’, 요시무라 아키’ ‘아라시’ 등의 소설에 기초 자료로 제공됐다.

■사건의 경과
1, 예조
 도마마에초는 일본해에 접하는 마을이지만, 삼모별 지구는 약간 내륙에 들어간 농촌부로, 롯센자와는 그중에서도 해안으로부터 약 킬로로 깊은 새로운 개척지였다. 입식 후 년 부족한 문이 길고 늪에 점재하고 있었다.
 산 속에서는 곰의 흔적은 많지만, 당시라도 인가 부근까지 나오는 것은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이 월상순부터 하순에 총 3회, 이케다가의 처마 아래에 매달린 옥수수를 한밤중에 곰이 거칠었다. 게다가 달에 들어가 마츠무라가에서도 같은 피해가 있어, 두 명의 마타기(사냥꾼)가 발포했지만, 상처를 입힌 것만으로 놓쳤다. 발자국은 본 적도 없는 크기였다고 한다. 이미 눈이 내리기 시작해 보통 동면에 들어가 있는 시기다.

2, 오타가 제1습격
 최초로 사건이 일어난 월 9일은 겨울 교통로인 빙교를 건설하기 위해 남중은 총출로 나무 벌채 작업 중이었다. 오전중 오타가가 거칠어져 연꽃 간웅(6세)의 시신이 남겨져, 아내 마유()도 근처의 산림에서 식해된 상태로 다음날 발견되었다.
 기무라 씨의 추측에서는, 이전과 같이 처마 끝의 옥수수를 먹으려고 나타난 갈색곰에, 집안에 있던 2명이 눈치채고, 큰소리에 역상한 곰이 실내에 들어가 아이를 일격으로 죽이고, 아내 마유를 감히 데리고 떠난 것 같다. 곰의 출입구는 모두 산쪽 창문이었다.

3, 오타가 제2의 습격
 다음날, 아침부터 남여의 수색대가, 곰의 발자취를 추적. 오오타가에서 150미터 정도 떨어진 토도마츠 부근에서 큰 곰이 갑자기 튀어나왔지만 총 5정 중 발사할 수 있었던 것은 1초. 그것도 벗어나 곰은 도망쳤다.
 마유의 시신은 이 토도마츠 나무의 뿌리에 묻혀 있었다. 다리와 머리를 남기고 심하게 식해당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시신은 오타가에 안치되어 친족들 9명만이 통야를 했다. "먹이가 있으면 곰이 온다"고 말해 마을 사람은 통야에는 그다지 오지 않았다.
 오후 8시 반쯤 브라운곰이 오타가의 벽을 꺾고 돌입했다. 관을 뒤집어 시체를 먹으려고 한 것 같다. 참석자 중 한 명이 총을 쐈기 때문에 곰은 곧 도주했다. 사람들은 빔 위나 ​​변소에 숨어 무사했다.

4, 명경가의 습격
 오타가에서 500미터 정도 떨어진 명경가에게는 여성과 어린이들이 피난했다. 어른은 남성 1명과 여성 2명, 나머지는 아이였다. 다른 마을 등에서 온 젊은이와 사냥꾼들은 다른 집에 집결했다.
 오타가의 통야를 거칠게 한 불곰은 오후 9시경, 명경가를 덮쳤다. "곰은 불을 두려워한다"고 믿어져 여러가지 불을 태우고 있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실내를 도망치는 마도 아이들이 잇달아 머리와 가슴을 물렸다. 임신 중이었던 사이토 대나무()는 "복파해줘. 목식하고 죽이고"라고 외치면서 태아와 함께 죽었다고 한다. 이 때, 메이케이 긴조(3세), 사이토 대나무, 능(6), 춘의(3)와 태아의 5명이 사망. 3명이 중상을 입었고, 1명은 3년 후에 사망했다.

5, 곰은 도망자도 떠나는
 근처의 집에 집결하고 있던 약인의 구원대가 명경가를 둘러쌌지만, 곰의 기색이나 사람의 신음소리로, 집안에는 넣지 않고, 발포도 할 수 없다 했다. 1시간이 지나면서, 곰이 튀어나왔지만, 이때도 가장 가까운 궁수는 불발했고, 곰은 도망쳤다.
 그날 밤, 롯센자와의 모든 주민들은 하류의 삼모별로 피난했다. 한겨울의 밤의 눈길을, 횃불을 손에 놓쳤다고 한다. 약인의 구원대만이 마을에 남았다.

6, 곰 사냥 본부 결성
 일이 되어, 대사건의 일보가 홋카이도청에 도착해, 되풀이해, 하포로 경찰 분서 출동의 지시가 나왔다. 곰 사냥 본부가 롯센자와에 가까운 농가에 설치되어 본부장은 경찰 분서장, 부본부장은 제실 임야국의 직원과 분교장의 교두. 가장 큰 방침은 문제의 곰을 산모 베쓰가와보다 하류에 침입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장례식을 기다리는 시신으로 곰을 끌어들인다는 고육의 방안이 나와 6 시신이 명경가에 놓여졌다. 실내에 야구라를 짜서 궁수가 매복했지만, 곰은 집 근처까지 왔지만, 기색을 파악했는지,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다음날에는 롯센자와의 무인 농가를 곰이 차례차례로 거칠게 하고, 닭을 죽이고, 곡류를 먹고, 의류를 끌어내었다. 이날만으로 피해는 8채에 달했다.
 일 오후 8시쯤 삼모별천의 빙교를 바라보던 토벌대원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인가, 곰인가」라고 말을 걸어, 응답이 없는 곳에 수정의 총을 쏘았지만, 또 불발이 많아, 곰은 도망갔다.

7, 사살
 일 아침, 전야의 강둑의 사격 지점에서는, 혈흔이 남아, 곰에 명중탄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몇 명의 토벌대가 눈 위의 발자취와 혈흔을 추적했다.
 오전 무렵, 이웃촌의 팔뚝 사냥꾼, 야마모토 효요시가 재빨리 미즈나라의 큰 나무 아래에 있는 곰을 찾아, 2발 발사해 가슴과 머리에 명중시켜, 곰을 쏘았다.
 추정 체중은 340㎔, 체장 2.7㍍. 7~8세 정도의 수컷. 등에서 가슴에 걸려 '질거리'라고 불리는 하얀 모양이 있었다.
 사살 직후, 날부터 날에 걸쳐, 폭풍우가 루모·소야 지방을 덮치고, 주민은 이것을 「붕풍」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많은 소설이나 영화의 타이틀도 되고 있다.


■기무라씨의 분석

 2009년 봄, 곰의 회 기념지 편집 위원 3명이, 삿포로시 미나미구의 기무라 모리타케씨 집을 방문했다. 기무라씨는 삼모별을 취재한 당시의 기재나 사진 등을 내 주셔서, 노트를 보면서, 사건의 경과와 그 요인이나 인간측의 대책의 문제를 논했다.
 기무라 씨는 "이 사건은 정말 유감이다. 비난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대응하면 습격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적어도 두 번째 명경가의 피해는 막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먼저 브라운곰 접근의 조짐이 있던 달 3건의 옥수수 거칠다. “처마 끝의 작물을 잡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험한 징후. 가장 소중한 말이 무사
 했기 때문에 안심했다고 할까, 무관심했던 듯한 인상이다” 것도 큰 실패다. 「총의 손질도 조작도 나쁘고, 어쨌든 쏘아 훼손이 많다. 곰에 대해서는 그다지 숙련되지 않은 데다, 모여 모으는 면들로, 견제한다고 할까, 제휴가 좋지 않았다.마치 혼합의 중」 그리고 힘든.
 조직에도 문제가 있었다. 「구마 사냥 본부」라고 해도, 톱은 경찰 분서장, 부대장은 임무관과 교두 선생. 아마추어가 지휘를 하면, 그다지 좋은 일은 없다. 인원수도 몇 명과 많지만, 중요한 추적·사살이라는 장면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나중에 참가한 이웃촌의 팔뚝 사냥꾼이 사실상 혼자 잡은 것이 이번 결말이다.
 애초에 이 곰은 왜 이런 연속 습격을 했을 것이다.
 최초의 오오타가의 2명 살해에 대해서, 기무라씨의 견해는, 「콧수염 노리였던 것이, 시끄러워져 역상해 살해」라고 하는 것이다. "마유 씨는 실내에서 강하게 저항한 흔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곰을 공격적으로 한 것은 아닐까. 도 전해지고 있다”
 곰은 일단 손에 넣은 먹이에는 강하게 집착한다. 오오타가의 통야를 덮친 것은 그 예다. "먹이를 되찾는다는 행동은 그 밖에도 볼 수 있다. 인간에게는 소중한 육친의 시신을 회수하고 통야를 영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곰은 그것을 먹이를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오타가를 덮쳐 격퇴된 후, 곰은 곧바로 여성·아이만의 명경가에 침입한다. 곰은 위험을 피하고 남자들이 모이는 집이 아니라 '먹이'가 되기 쉬운 집을 습격했다.
 「인간의 분도 방심이라고 할까, 판단의 잘못이 있었다. 명경가는 큰 집이라고 하지만, 성인 남성은 1명만. 총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 정도의 사수가 다른 집에 집결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위를 붙이면 되는데, 그것을 하고 있지 않았다.리스크의 판단을 하고 있지 않고, 제대로 판단하는 사람도 없었던 상태일 것이다」
 기무라씨는 초겨울이라고 하는 시기에도 주목 한다. 「보통이라면 겨울의 구멍 덩어리에 들어가는 시기. 구멍에 들어가지 않고, 육식에 의존하는 타입의 곰이었을지도 모른다. 해외에서도 『구멍 없는』은 위험하다고 두려워하고 있다」

 기무라씨는 「브라운곰은 『맹수』가 아니라 『강수』라고 한다. 힘은 강하고, 송곳니나 손톱도 날카롭지만, 본래라면 함부로 사람을 덮치는 것은 없다. 무언가의 계기로 이상한 행동을 일으키게 된다. "삼모별의 이 곰도 어딘가에서 특수해진 것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3. '사상 최악의 곰곰 사건'을 읽는다.


 사상 최악의 브라운 베어 사건 「삼모별 사건」―최악이었던 것은 나타난 브라운 베어였는지, 아니면 인간의 대응이었는지, 거기를 풀어 두어야 한다.

 연구에 의하면 곰의 지능은 「개와 영장류의 사이」로 되어 매우 높다. 학습 능력이 뛰어나 경험에 따라 행동 패턴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킨다.
 다만, 대단한 인신 피해를 미치는 '이상 곰' '위험 곰'의 대부분은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의 우연한 계기에서 서서히 변화해 그렇게 되어 간다. 특히 한번 먹은 인위적인 음식에 관해서, 곰은 「집착」「상습화」하고, 그것을 만연하게 방치하면, 행동의 에스컬레이트를 일으키는
 대체로에 있어서 곰은 당초, 「야말로 진흙 타입」으로, 어디까지나 눈길을 훔친 에서 식량을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상습화에 이르러 ‘강도 타입’으로 변모하기 쉬운 것이다. 삼모별 사건에서도 처마 아래의 옥수수 거칠기가 집인에게 발견되어 '거직 강도'가 되어 보다 공격적인 살인자로 변모했을 가능성을 볼 수 있다.
 같은 '이야말로 진흙'에서도 그것이 인가나 텐트 겨드랑이라면 이미 변모를 일으키고 있는 증거다. 불곰의 생존 전략인 '경계심'이 희미해져 어쩌면 인간을 핥아 걸게 되어 있는 개체다. 이 단계의 곰은 인간에 대한 거리가 가까워지고, 무언가의 박자에 역길레해 공격해 오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즉, 큰 사건을 일으키는 곰은, 그 전에 반드시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인간의 주변에 대해, 어떠한 예조를 보인다.

 삼모별 사건에서는 사건이 일어나는 한 달 정도 전부터 처마 앞의 가문비나무가 곰에게 먹을 수 있는 피해가 생겼다. 아마도 이 지역에서는 가문비비비를 비롯한 다양한 음식 관리가 달고 가해곰은 여러 곳에서 같은 행위를 하면서 '인가=먹이'라는 연관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것은 먹은 쪽에서 하면 단순히 코소 진흙적 피해인데, 인위물에 의한 「먹이기」의 일종이며, 곰은 그 「장소」나 「먹이의 종류」인가 「인간」의 어느 쪽인가에 집착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장소가 인가 등 인간이 활동하는 공간이었을 경우에는, 무언가의 박자에 인신 피해에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통상, 곰은 성장과 함께 「고립성」과 「경계심」을 획득해 가지만, 삼모별의 가해 곰은, 처마 아래의 옥수수를 먹어 오는 것 자체, 꽤 경계심이 부족한 상태로, 성수 로서는 이상한 상태였다. 즉, 처마 끝의 옥수수를 먹을 수 있다는 겉보기 사소한 사건이 더 심각한 피해의 전조였다.
 지역이든 개인이라도, 대피곰의 리스크 매니지먼트의 철칙은 「조기 발견·조기 대처」. 선수 선수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전조가 나타날 때 그것을 놓치지 않고 즉각 대응하지 않으면 상황은 나선형으로 나빠진다.
 대응의 요점은 「예측」이다. 다음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예측하고 그것에 제대로 대응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곰곰을 정확히 아는'이라는 너무 당연한 것이 필요 불가결하다. 즉, 정상적인 곰의 생활과 그 곰이 어떠한 경험·학습에 의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사실을 바탕으로 이로정연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 부유하는 「풍설」이나 「추억」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적절한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훈련받은 전문가와 사태를 합리적으로 파악하는 일반 시민이 모두 필요하다.

 그렇다면 만일 '전조'를 놓치고 예측조차 어려운 나쁜 사태가 되어 버렸을 때는 어떻게 할까.
 이는 100년 전이나 현대도 변하지 않는다. 실력으로 그 곰을 멈춘다 - 즉, 우수한 "곰 쏴"가 필요하게 된다.
 삼모별로는 몇명의 사수가 있었지만, 손질도 훈련도 불충분한, 까마귀의 중이었다. 만약 현장 산림에 군대나 경관대를 도입해도 그런 100명의 곰 아마추어보다 단 한 명의 뛰어난 곰 촬영이 의지가 되었고, 삼모별로도 그랬다.
 총이라는 것은 단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위험조차 있다. 만일 사격의 팔이 좋더라도, 곰의 행동을 읽고, 대치한 경험이 부족하면, 역시 위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성능·고위력의 총기를 취급하는 요즘의 헌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총은 지난 1세기에 꾸준히 고성능이 됐지만, 헌터는 곰 쏘아서 그만큼 진화를 이룬 것인가. 불행히도 부정이다.
 또 하나, 삼모별로 신경이 쓰이는 것은, 「지역의 리스크 매니지먼트」가 약한 점이다. 두 사람이 사망한 오타가의 통야 때 많은 주민들은 곰을 두려워 오타가에 접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본래라면, 지역에서 단결해 충분한 경비를 해 오타가에 모이는지, 아니면, 시신과 함께 전원이 하류 방면으로 피난할 것인가. 오오타가에서는 결과적으로 피해를 면했지만, 이것은 리스크 매니지먼트상, 지역의 단결이나 판단이 기능하고 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삼모별 사건의 경과를 보면, 전조의 파악, 지역 전체의 정보 공유와 리스크 회피, 위험 곰을 실력으로 멈출 준비, 피해자의 시신의 경호 등, 여러가지 점에서 가해 곰의 후손을 밟아 있다. 그리고 무지 때문에 유단으로부터인지 몇 명의 구원대를 갖추면서 무방비한 장소를 만들고 거기를 깨고 대참사가 되었다.
 갈색 곰은 "코에서도 보는"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후각이 날카롭다. 어둠 속에서도 저격진이 기다리는 장소를 경원하고 여성·아이 밖에 없는 장소를 습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요즘은 사냥꾼의 고령화·감소라는 것이 알려져 있지만, 더 절실한 것은 「공동화」 총수 이상으로 급감하고 있는 현실이다. 홋카이도에는 이미 곰 쏘지 않는 지역이 있으며, 그것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삼모별 사건이 일어난 동시대 미국. 1920년 여름부터 가을, 옐로스톤 국립공원 내에서 캘리포니아 대학 박물관의 표본용 곰(그리즐리, 하이이로그마)을 5마리 포살하는 허가를 얻은 색스톤 포프 박사와 아서 영이라는 두 젊은이는, 5마리 모든 곰을 활살만으로 쓰러뜨렸다.
 당시의 「활화살」은 라이플은 커녕 샷건이나 무라타 총보다 명중 정밀도가 낮고 사정거리도 훨씬 짧다. 두 사람은 그 도구를 굳이 선택해, 곰의 포살을 향한 것이다.
 그들은 곰의 습성을 자세히 알고, 곰을 쫓고, 뒤를 걸어 다가가, 활화살의 사거리에 넣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곰의 해부 등으로부터, 어디에 어떤 각도로 화살을 맞히면 곰이 쓰러뜨릴 수 있을지, 실수를 범하면 어떤 반격에 맞는지 등, 실천면에서의 지식과 각오와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 예는 내가 아는 가운데 "곰에 대항하여 인간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예이다.
 100년 전의 홋카이도. 시턴이든 호프 박사이든 다른 수준 이상의 곰 사냥꾼이라도 좋고, 단 한 명의 '진짜 곰 쏘기'가 삼모별에 있다면 아마도 '사상 최악의 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흉폭화한 이 곰을 빨리 잡았기 때문이 아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이 곰의 에스컬레이트·흉폭화 자체를 예측하고 저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진짜 곰 촬영」이란, 「곰을 아는 사람」을 말한다.

 당시의 도마 전의 사람들은, 그 지식과 기력의 한, 할 수 있는 대응을 취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넌센스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의 고통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이다.

 사건으로부터 약 1세기가 흘렀다. 에디슨의 발명은 PC와 휴대 전화의 편리함으로 바뀌었다. 전세계의 곰 촬영과 연구자에 의해 곰의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져 총기나 방제 수법 등의 기술·자재도 진화해 왔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의 홋카이도 사람-주민·행정·헌터·관광객은 곰을 알았는가? 그리고, 삼모별의 사건으로부터 배워, 합리적인 대응을 취하고 있을까?
 불행히도, 부정이다.
 삼모별의 처마의 가문비나무와 같이, 현대의 곰도, 인리나 농지에서 생 쓰레기나 농산물등의 인위적인 먹이를 먹이고, 사슴 고기를 넣은 상자 와나가 부주의하게 인리에 놓여져 있다. 의식, 무의식 외에도 주변의 곰을 인리에 유인하고 특히 젊은 부주의한 개체를 애틀랜덤에 포획하고 죽이고 있다. 문제 곰의 식별·배제 오히려 명백한 분죄 곰의 발생이다.
 지능이 높은 곰은 뛰어난 기억력 외에 높은 유추 능력을 가진다. 인리에서 인위를 먹고 인간의 냄새가 나는 쓰레기를 먹은 곰은 인간과 인리에 접근하는 곰으로 바뀐다. 또, 상자 와나의 다용은, 「와나를 경계해, 와나에 걸리지 않는 개체」(트랩샤이)를 낳는다. 요즈음의 상자 와나에의 과도한 의존은, 곰을 추적해 포살하는 기술이 없는, 「곰 쏘지 부재」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트랩 샤이가 만연한 지역에서 「이상 곰」이 나타났을 경우, 와나도 효과가 없고 사살도 할 수 없다는 수상 상태가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보면, 이 1세기의 과학이나 생활면의 진보에 비해, 홋카이도의 브라운 베어 대응은, 삼모별 사건의 시대로부터 거의 변화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특히 중산간 지역에서 과소화가 진행되어 인리의 에너지가 떨어지고 있는 현재. 어쩌면 삼모별 사건 재래 가능성이 어딘가에서 진행되지 않았는지 불안해진다.
 지금부터라도 삼모별 사건에 배워야 할 것은 많지만,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브라운곰을 개체 식별하고 1마리 1마리를 평가·판단한다"는 것이다.
 학습 능력이 높은 곰은 개성의 변동이 심하다. 각각의 경험이나 학습으로, 행동은 천차만별로 변화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곰이다!」라고 한마디로 생각하는 것은 안되는 것이다. ‘곰이 나왔다’는 추상적인 견해를 하고 있는 한, 문제 곰이 나타내는 미묘한 ‘전조’를 간과해 피해의 억지 곳이나 ‘분죄 곰’의 포살을 만연하게 이어가게 된다. 예측이나 개체 식별 없는 구제 활동은 곰에 대한 무차별한 복수나 테러와 같다.

 사냥꾼의 감소, 인리의 과소, 트랩샤이의 만연, 그리고 주민의 무관심을 생각하면, 현재의, 그리고 앞으로의 홋카이도는 상당히 위험하다. 이에 대해 행정이 취해야 할 수법은 두 가지 전문가를 안는 것이다. 하나는, 전조를 감지해 효과적인 대책을 현지에 제안해, 포살의 판단도 실시하는 현장형의 「브라운 대책원」. 또 하나는, 마지막 요새로서의 뛰어난 「곰 쏴」. 이 두 전문가를 육성 배치하고, 그들의 활동을 지역이 이해하는 것이 삼모별 사건의 재래를 막고, 진정한 의미로 곰과 홋카이도민이 공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삼모별 사건'은 그 굉장함에서 몇 가지 소설·영화의 소재가 되었고, 후세의 인간을 떨게 하는 곰곰 사건으로서 세상에 인상을 받았다.
 마을의 향토 자료관을 방문해 놀라게 되는 것은, 몇개의 곰의 박제와 함께, 곰의 다양한 음식-그 대부분은 식물질-이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브라운곰 세계에 들어가는 방문자 센터와 같은 전시 수법이다. 즉, 도마 앞에서는, 삼모별 사건을 「사상 최악의 곰 사건」이라고 소개하면서도, 「브라운 곰」에는 시종하고 있지 않다. 적어도, 「곰곰을 아는」방향으로 의식이 향하고 있다. 이 마을은 사건을 다양한 각도에서 극복하고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디뎠는 것처럼 나에게는 느껴졌다.
 삼모별 피해자의 공양이나 복수로부터, 피해자 1명당 10마리의 곰을 죽이면 맹세하고 그것을 달성한 팔의 좋은 사냥꾼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 기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그러면 미래에 연결되지 않는다. 불곰의 피해 해소로 이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 미래로 이어지지 않는다. 만약 그 사냥꾼이 복수의 과정에서 불곰이라는 야생동물의 정체를 추정했다면 그는 피해자와 함께 죽인 곰의 공양을 했을 것이다.
 도마 전의 자료관에서 내가 느낀 방향성은 복수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사건을 반복하지 않을지 의식이 향하고 있다. 삼모별 사건을 소설이나 영화로 보고 물어보고 곰의 환영에 공포해, 아직도 거기에서 밖에 곰에 대응할 수 없는 홋카이도의 많은 지역으로부터 비교하면, 꽤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이 기수)

 

【수해】후쿠오카 다이완겔부・브라운 곰 습격 사건

1970년(쇼와 45년) 7월에 홋카이도 히다카군 시즈우치쵸(현·신히다카쵸 시즈우치 타카미)의 히다카 산맥의 캄이에쿠우치카우시산에서 발생한 수해 사건.

젊은 암컷의 곰이 등산 중인 후쿠오카 대학의 원더 포겔부를 덮쳐 죽은 자 3명을 냈다.

후쿠오카 대학 원더포겔 동호회 히구마 습격 사건, 후쿠오카 대학 원겔 부원 히다카야마 계 조난 사건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사건 개요】

1970년 7월, 히다카 산맥을 종주하지 못하고 있던 후쿠오카 대학 원겔부 5명이 집요하게 곰에게 습격당해, 3명이 차례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원겔…원더포겔(독일어로 철새를 의미한다)

20세기 초, 청소년 사이에, 야마노를 도보 여행해, 자연과 친근하면서 심신을 단련하려고 하는 운동이 시작되어, 이것을 원더 포겔이라고 부른다.

전후, 일본에서도 이 운동이 퍼져, 하드한 「산 등반」을 실시하는 산악부와는 달리, 「산 걷기」 「자연 산책」이라고 하는 이미지가 강해, 거기가 학생의 인기를 모았다.

1970년 7월 후쿠오카대학 원더포겔 부원 5명 파티가 히다카산맥(홋카이도)의 아무로다케(메무로만 1754m)에서 페테가리다케(1736m)까지 히다카산계 종주를 미끄러지게 입산했다.

파티

・다케스에 이치토시씨(경제학부 3년 20세 리더)・타키 슌지 씨( 법학부
3년 당시 22세 서브 리더) ) · 가와라 요시 타카 씨 (경제 학부 1 년 18 세)


5명은 7월 12일 오전 9시에 규슈 하카타에서 열차 '쓰쿠시 1호'에서 출발하여 14일 신토쿠(신토쿠)에 도착.

신득서 어영(신토쿠쇼미카게) 파출소 등에 등산계획서를 제출하고 그날 오후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7월 25일

중간 지점인 캄이에쿠우치카우시산(1979m)에 빠져 있던 5명이었지만, 대폭으로 예정이 늦었기 때문에, 다음날 등정 후에 하산하기로 했다.

캄이에쿠우치카우시는 '곰이 넘어질 정도로 험한 미네'라는 뜻이다.

이날 저녁 파티는 봉우리 바로 아래의 '쿠노자와 컬'(※)이라는 곳에서 텐트를 쳤지만, 여기서 브라운 베어로부터의 첫 습격을 받았다.

발견한 것은 다케스에씨로, 텐트에서 7m 정도 떨어진 곳에 곰은 있어, 당초 파티는 아무도 곰을 무서워하지 않고, 잠시 흥미 본위로 보고 있었지만, 이윽고 브라운 곰으로부터 가까워져, 텐트 밖에 있던 등산용의 잭을 잡아, 안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발견한 지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이다. 멤버들은 라디오의 음량을 높이고 불을 찔러 식기를 울려 어떻게든 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컬…빙하의 침식에 의해, 산정 바로 아래의 경사면이, 복각한 것처럼 원형으로 깎인 지형. 일본에서는 히다(히다), 아카시, 히다카산맥 등에서 볼 수 있다. 권곡(켄코쿠).

그러나 오후 9시경 피곤해서 잠들었던 파티는 곰의 숨결으로 일어나게 된다. 곰은 텐트에 주먹 큰 구멍을 뚫고 나서 떠났다.

이것이 2번째의 습격으로, 멤버는 2명씩 2시간 교체로 감시를 세우기로 했다.

7월 26일 오전 3시, 기상. 쾌청.

결국 멤버들은 공포 때문에 누구 한 사람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리고 4시 반경, 3번째의 곰의 습격을 받는다. 곰은 집요하게 텐트를 계속 끌어당기기 때문에 파티는 텐트를 버리고 밖으로 퇴피했다.

브라운 곰은 텐트를 물리 쳤고, 불행히도 등산을위한 잭을 잡고있었습니다.

다케스에씨의 명령에 의해, 서브 리더인 타키씨와 1학년의 하와라씨가 영림서에 연락해, 헌터에 의한 구조의 요청을 해 산을 내리기 시작했다.

2명은 도중의 하치노자와에서 다른 대학생 파티 ‘홋카이다케 친구회’(홋카이도 학원대학의 학생 10명 정도)를 만난다.

홋카이다케 친구회도 또 곰(아마도 같은 개체)에 습격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산한다는 것으로, 2명은 전달을 부탁하고, 또 식량이나 지도, 휘발유 등을 양도받고, 다시 남는 3명을 도우려고 돌아가 했다.

타키씨와 카와하라씨는 돌아오는 도중에 2조의 대학생 파티를 만난 후, 오후 1시경에 다른 3명과 합류. 텐트를 수선하고, 설영하고, 저녁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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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마치고 자러 가려고했던 오후 4시 반경

예의 곰이 다시 나타났고, 텐트 옆을 떠나지 않고, 그 후 약 1시간이나 계속 앉았다.

파티는 그 자리에 계속 있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하치노자와에서 설영하고 있던 돗토리대 파티(타키 씨들이 방금 만난 파티)의 텐트에 넣어 주려고 했다.

산을 내리듯이 주변은 이미 어두웠다. 그래도 5명은 무아 열중으로 계속 걸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오후 6시 반, 니시이 씨가 문득 뒤를 되돌아 보면, 거기까지 곰이 와 있었다. 전원 한눈에 내려가기 시작한다. 불곰은 가와라 씨를 쫓아 다른 멤버는 '갸'라는 외침을 들었다.

"치쿠쇼!"

어둠 속에서 카와하라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와라 씨는 배후부터 곰에 습격당하고 있어, 격투 끝에 돗토리대의 텐트 쪽으로 다리를 끌어당기면서 내려가는 것을 다케스에씨가 목격하고 있었다.

타케스에 씨, 폭포 씨, 니시이 씨의 3명은 돗토리 대파티에 도움을 구했고, 그들은 휘슬을 불었다.

이윽고 돗토리대 파티와 헤어졌고, 3명은 이와바에 올라 밤을 밝혔다. 흥지씨는 도망가는 도중에 다른 멤버들로부터 벗어나 다른 장소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3명은 가와라씨의 무사를 기도하면서, 헛된 흥지씨의 이름을 계속 불렀지만, 1회 응답한 것만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7월 27일 이른 아침

깊은 안개 때문에 시야는 5m 정도로, 뒤틀린 두 사람을 찾거나, 곰의 접근을 탐지하기에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3명은 오전 8시경까지 가와라씨와 흥지씨를 찾았지만, 응답은 없고, 일단 하산하기로 했다.

내려가는 도중, 제일 앞을 걸고 있던 다케스에씨는 하방 2~3m에 곰이 있는 것을 발견.

불곰은 도망치는 다케스에씨를 쫓아, 이 틈에 타키씨 니시이씨는 어떻게든 고노자와의 사방 댐 공사 현장까지 가고, 자동차의 준비를 부탁한다.

이것이 오후 1시경입니다. 그리고 더욱 기슭의 중찰내(나카사츠나이) 주재소에 도착했지만, 오후 6시로 되어 있었다.

7월 28일 조난한 멤버들의 구조대가 편성됐다.

하지만 사냥꾼들이 발견한 것은 3명의 변한 시신이었다.

옷은 벗겨져 벌거 벗은 벨트 만 감겨있는 상태였다.

얼굴 절반이 없거나 복부에서 장이 끌어내리는 등 눈을 돌리고 싶어지는 광경이었다.

검사 결과에 의하면, 3명의 사인은 「경추(경련) 골절 및 경동맥절손(케이도 맥쿠세센)에 의한 실혈사」였다.

치명적인 상처는 목, 얼굴, 가랑이 사이의 3점으로 한정된다.

3명은 모두 도망치고 있는 도중에 뒤에서 둔부(전부.신체의 흔적의 부분)를 공격받아, 우울하게 쓰러진 곳을 둔부나 항문부를 물린 것으로 보였다.

악천후에 의해 3명의 시신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하치노자와에서 관택에 붙어 유족에게 유골이 넘겨지게 되었다.

7월 26일에 동료와 얽힌 흥지씨는 텐트에 일단 돌아온 것 같고, 텐트 자취에는 그의 남긴 메모가 있었다.

글자부터는 그가 단 하나 공포와 싸우고 떨리면서 이것을 썼다는 것을 알았다.

26일 오후 5시.
저녁 식사 후 곰 나타나는 텐트 탈출. 돗토리대 WV의 곳에 구조를 요구하여 캠예크 아래의 컬에 내린다.

17:30 우리에게 곰이 따라잡는다. 가와라가 당한 것 같다.

나의 5m 옆, 위치는 초장의 가케를 내려 하이 소나무 지대에 들어간 후 20m 아래의 지점. 그리고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이 소나무를 옆에 뿌린다.

그러자 가케 위였기 때문에, 가케의 중간점에서 숨을 쉰다고, 다케스에씨가 소리를 내며 돗토리대 WV에게 도움을 구했다.

나의 위치에서는 아래의 모습은 전혀 몰랐다. 곰의 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다케스에씨가 뭔가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던, 전혀 듣지 못하고, 곰의 위치를 ​​모른다.

가케아래쪽에 2, 3곳에 모닥불이 보인다. 텐트에 걸려 가자, 굴을 5분 정도 내려, 아래를 보면 20m 앞에 곰이 있었다.

나를 찾아내면, 올라왔기 때문에 한눈에 도망친다. 앞, 뒤로 옆으로 넘어져, 그래도 되돌아보지 않고 전의 텐트 안경, 겨우 안으로 걸어 넣는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버렸다, 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슈라프가 있었기 때문에, 곧 하나를 꺼내, 안으로 들어가 큰 숨을 조정한다. 잠시 후, 왠지 안심감이 나와서 침착했다.

그래도 바람 소리와 잔디 소리가 신경 쓰여 잠을 잘 수 없다. 돗토리대 WV가, 무사히 보고하고, 구조대가 오기를 기도해 자는다.

27일 4:00 깨어난다.
밖의 일이, 신경이 쓰이지만, 무서워서, 8시까지 텐트 안에 있는 것으로 한다.

텐트 안을 바라보니 캠핑이 있었기 때문에 안을 보면 밥이 있었다. 이것으로 조금 안심한다. 위쪽은 가스가 걸려 있기 때문에 조금 기분 나쁘다.

또 5:20이다. 또, 곰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되므로, 또 슈라프에도 넣는다. 아, 빨리 하카타로 돌아가고 싶다

7:00 사와를 내리기로 한다. 활기차게 만들어 텐트 안에 있던 셔츠와 딱정벌레를 걸친다. 텐트를 나와 보면 5m 위에 역시 곰이 있었다.

너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대로 텐트 안에 있다.

8:00경까지…(판독 불능) 그러나…(판별 불능)을, 통과하지 않는다. 다른 멤버들은 이미 하산했는가. 돗토리대 WV는 연락해 주었는가. 언제 도와 드릴까. 모두, 불안하고 괜찮다…. 또 가스가 진해져…

그리고 텐트 속에 혼자 있는 곳을, 흥하리씨는 곰에 습격하게 되었다.

29일 후쿠오카 다이완겔부 5명을 덮친 곰은 헌터 10명에 의해 사살되었다. 위장이 조사되었지만 그 곰은 인간을 먹지 않았다.

장난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곰은 4살이 되어 교미를 한 흔적은 없었다. 보통 2살 정도로 아이를 낳는 것 같다.

이 곰을 잡은 사냥꾼들은 '산의 흔들림'으로 이 고기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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